비슷한 상황을 나는 가끔 우리나라에 가면 느낀다. 일례로 뉴스 자체도 황당 그자체일때가 많지만 그 뉴스를 둘러싼 컨텍스트가 더 생경할 때가 있는것.
서울시 의원이라는 사람이 살인 청부를 맡겼다는 것보다 살인 청부라는 개념 자체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우리나라는 누군가 돈만 치르면 쥐도새도 모르게 갈수도 있는 나라구나..), 코미디 프로그램이 소수자 비하를 노골적으로 하는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불편해 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재난이 발생했을때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나라의 시스템이 전혀 없었던 문제가, 누군가의 아들을 도와준 민간인과 그들이 시켜먹은 배달음식으로 옮겨가는 과정도 놀랍기 그지없을 따름.
이처럼 팩트보다 팩트를 둘러싼 컨텍스트가 더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중 하나는 우리나라 사회에 공기처럼 만연되어 있지만 정작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는, 팽배하다 못해 곧 터질듯한 물질 만능주의.
잠시 한국에 다녀온 기간동안 두 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처가쪽 친척중 한분이 운전면허 시험장을 오랫동안 운영했는데 그 넓다란 부지에 아파트 수백세대를 짓게 되어서 떼돈을 벌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 하나는 — 역시나 아파트 단지와 관련된 이야기지만 — 이와 반대로, 어떤 분이 고만고만한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앞에 신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 자녀가 겪게 되었던 이야기.
이분들 가정은 청소년 전도사로, 선교단체의 간사로 섬기는 젊은 부부. 충분히 직장생활을 잘 하고 남들처럼 돈을 잘 벌수 있었지만 소명을 받고 스스로 성직의 길을 걸으면서 가난하게 사는 길을 택한 분들이다. 우리 사회에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는데만 관심이 가있어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이처럼 스스로 가난을 자처하면서 자신보다 남을 돕는 일에 더 관심이 있는, 깨어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도 분명 있다.
자그마한 빌라에 살 때만 해도 집은 작아도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면 되겠지 라고 생각을 했지만, 어느날 바로 길 앞으로 수천세대 신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고, 길 하나 차이인지라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 배정되게 되었다. 문제는 대단지 아파트다보니 반에서 이집 아이 한명만 빌라에 살고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그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던 것. 졸지에 이 아이는 이름 “누구누구” 에서, “빌라 사는 애”로 통하게 되었고, 눈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차별을 받게 되었다고. 급기야 초등학교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쾌활하고 리더십 있던 이 아이는 정신적인 상담을 받아야 할 만큼 스트레스가 커지게 되었다. 수천세대나 되는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도 동호수만 들으면 그것을 평수로 곧바로 치환할 수 있는 연산력을 부모들은 물론 그들의 아이들도 가지고 있는 마당에 (평형대를 섞는 보안 기교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림), 하물며 “빌라 사는 애”를 가만히 놔두었겠는가.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쾌활한 모습을 다시 회복하고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대학교 1학년도 아니고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일어났다는게 믿어지기 힘들었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우리 자랄때가 어쩌면 더 좋았었구나. 수많은 정치인들이 선거때마다 목이 터져라 외쳤던 “따뜻한 자본주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가진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도, 그 어린 나이에 돌처럼 차갑게 굳은 마음을 기어이 안겨주고야 마는 비정한 자본주의뿐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이 결코 남의 일이 될수 없듯, 이러한 이야기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될수 없다.
우리 사회시스템과 정치인들은 따뜻한 자본주의를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지만, 이 모든것을 국가와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 역시 몇년전에 화장실에 휴지가 떨어져도 대통령 탓, 한일전 축구를 져도 대통령 탓으로 돌리던 후진적 민주주의 행태로 후퇴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기부의 문화가 더 정착해야 한다고 본다. 세금 이슈 때문이든 어쨌든 간에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기부의 문화가 더 정착해 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글을 읽으면 재미있는게, 가진 사람들이 더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 역시 어찌보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역사상 어떤 사회도 극심한 빈부격차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화난 농민들에 의한 혁명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것. (그렇다면 부자로써 누리고 있는 지위가 보다 long term sustainable 해지기 위해서는 빈층이 너무 가난하면 안된다는 논리?) 논리가 어쨌든, 이유가 어쨌든 간에 가진 사람들이 못 가진 사람들을 더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이 “따뜻한 자본주의”를 가져오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을 줄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