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터질것처럼 팽팽하던 소방 호스가 드디어 단박에 터져서 여기저기 험한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것만큼이나 분노에 찬 글과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때, 이 헐렁한 블로그에서까지 또 하나의 관련 글을 구태여 보탤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지진으로 따지자면 진도 8.2 정도의 사회적 진통이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고 있는 동시대인의 한명으로써,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순 없다. 그냥 머리 한켠으로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무런 순서 없이 나열해 보자면..
* “그분들”이 인터넷을 보지 않는게 문제다. 누군가 아마 폰트 14 크기로 “어제 3만여명 촛불행진, 부상자 2명” 등이 씌여진 보고서를 써서 올렸을 게다. 인터넷에 로그인을 해서 보는것과 아래아 한글로 요약된 보고서를 읽는 것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 차이가 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 지도 모른다.
* 이런 시국에 “시더분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것 자체가 머쓱하게 여겨질 정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이다. 그러나 머리 한켠으로 살짝 지나가는 생각중 하나는, 블로고스피어에 시더분한 이야기도 아주 가끔은 올라왔으면 좋겠다. 뭐랄까, 다양성이라고 할까? 온 나라가 진통중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로 오늘이 첫사랑을 발견한 그 날이었을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에서야 부산 사직구장에 난생 처음 가봤을 수도 있을테며, 어떤 사람들은 오늘이 그간 적금 들었던 거 깬 돈으로 드디어 싱가폴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날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그런 “시더분한” – 그러나 자기에게는 소중할 수 있는 – 이야기를 블로그가 아니면 어디에 쓰겠나. 세상은 금방이라도 망할 듯 시끌벅적하지만, “Life goes on” 이라는 노랫말처럼 우리 각자는 오늘도 소소한 인생사를 겪어 나간다. 자칫 그런 편한 이야기들이 한가하고 시대정신 없는 소리로만 치부 내지는 격하되진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시대정신을 놓고 살자는 얘기는 아니고.
* 지난주 화요일, 우리 회사는 밤을 꼬박 샜다. 그 다음날 텍스트큐브닷컴의 외부 초대장 부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개발자들이 개인적으로 밤샌 경우는 그 이전에 훨씬 많았을 거다. 내 말은 우리 팀 전체가 밤을 샜다는 거고, 그건 이번달 들어 벌써 두번째 일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근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로 그 하루이틀 후부터 촛불시위가 본격화되었고, 주말경에는 “국가 비상사태”로 여겨도 좋을만큼 사태가 커졌다. 블로고스피어에 텍스트큐브닷컴이 이슈로 자리잡을 여지는 조금도 없어보였고,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팀에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텍스트큐브닷컴 홍보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보인다, 묵묵히 기능개선에 힘쓰자”고 말했다. 근데 한켠으로 좀 속상하고, 고생한 팀들에게 내 잘못도 아닌데 왠지모를 미안함이 조금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텍스트큐브닷컴을 시작한 거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무수히 많이 쌓여있다.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다.
* 작년말에 인터넷에서 대선후보 성향을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에 따르자면 나는 매우 보수 성향이다. (그래서 윤호님과 정치적인 이야기는 왠만하면 안하려 한다.^^) 글쎄, 보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체로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장해야 한다고 믿으며, 나 자신도 대기업 출신으로 대기업에 대해 온갖 욕을 다 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아직도 세 배는 더 커져야 한다고 믿는다. 누구말 맞다나 자립형 사립고는 설립자 가문에 매년 돈을 떨궈주는 화수분같은 존재일 뿐, 실제로는 온갖 비리의 온상인 “사학”을 한 200개쯤으로 늘려놓자는 위험한 시도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사고같은 학교는 우리나라에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가 살 길은 싱가폴이나 네덜란드처럼 영어가 잘 통하고 외국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길뿐이라는 데 대해서 매우 매우 확고한 믿음이 있으며, 따라서 영어 몰입식 교육도 현실적으로 가능만 하다면야 시행했으면 좋겠다. (잠깐, 이것도 “보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국제 협상을 저렇게 졸속으로 해놓고, 기존 언론을 통한 여론 몰이를 통해서 국민들을 교화시켜서 슬쩍 넘어가려 했다는 것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잘못임에 분명하다. 보수냐 진보냐, 이건 이러한 명백한 실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에 도둑이 들어왔는데 태권도를 써서 제압해야 하냐, 주짓수를 써서 제압해야 하냐를 놓고 싸우는 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대한 수습책을 마련해야 한다. 어차피 국민이 원하는 방향대로 될 것인데, 돌아서 갈 필요 없다. 이번에도 또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다면, 그 결과는 정말 우리가 예측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나의 보수 성향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 김우중씨가 망명도중 포츈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던 심경이 있다. 돌이켜보니, 본인의 유일한 잘못이자 실수는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던 것” 이었다는 내용이었다. CEO들은 대개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한다. 근데 그게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이다. 김우중씨처럼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20조원대의 부도를 냈다. 기업은 부도가 날 수 있지만, 국가는 절대로 부도가 나면 안된다. 747 못지켜도, 대운하 안 파도 뭐라고 할 사람 없다. 공무원이 아침에 일찍 안나온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전세계적으로 유가 공황에 저성장세라는 거 다 이해하는데, 왜 그리도 쫓겼을까. 어쩌면 김우중씨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건 아닐지.
*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온다고 해서 그걸 먹는 사람들마다 족족 광우병에 걸릴 거라는 건 분명 과장이다. 미국인들도 내장같은 곳은 잘 안먹지만, 그들이 자주 먹는 햄버거는 주로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를 갈아서 만든다. 그러나 미국에서 광우병 케이스는 최근 보고되지 않았다. 따라서 확률로만 따진다면 사람들이 미국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매우 매우 낮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률 없는 괴담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전혀 가능성없는 괴담”도, “한국인의 94%가 걸린다”도 아니다. 정답은 “아직 잘 모른다”이다. 잘 모르면 최대한 그나마 알고있는 상식이 도달하는 데까지는 안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 히틀러 통치때 독일 국내에서 극렬한 반대운동이 있었다는 말이 역사책에 별로 없는걸 보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지배적인 만트라(mantra)에 강력히 이끌려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2002년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한국에서 축구를 보지 않았던 사람은 지극히 정상적이더라도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었던 것이 그 예다. 요새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불과 100일전에 투표자의 다수가 뽑았던 대통령에 대해서 “저 쥐새끼 가죽을 벗겨서 축구공을 만들어 돼지우리에 쳐넣자” 고 말하는 정도는 어찌보면 귀여운 수준에 속한다. 이러한 오늘의 한국이 조금은 섬뜩할 때가 있다. (나나, 아니면 그렇게 극렬하게 퍼붓는 당신이 대통령에 된다고 해서 가죽 벗겨 죽일놈 소리 안 들을 자신 있나… 그런 생각에 이르면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한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동조하지 않는 댓글에는 무조건 예외없이 “야 이 알바새끼야, 밥은 쳐먹고 다니냐” 라는 공격이 쏟아지며, 폭력 전경이라고 100%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신상과 전화번호가 그대로 인터넷에 노출되는 것 역시 매우 불편하다. 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의 거센 목소리의 힘이 소수에 대한 또다른 형태의 권력으로 작용하면 안 된다.
*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패자중 하나는 기존 미디어다. 그들이 국민을 은근히 바보로 여기는거 정말 싫다. 한두달 전부터 공기업 단체장들의 방만한 경영 소식을 슬슬 그러나 꾸준히 내보내는 걸 보고, 우리 국민들은 “아, 이제 민영화 하니깐 앞서서 길 깔아주는구나” 라고 말하지, “아 그랬어? 몰랐네” 이러지 않는다. 다 알면서 귀엽게 봐주는 거다. 하지만 편집권이 문제지, 조중동에 속한 기자들중에는 좋은 사람들 역시 많다는 걸 잊지 말자.
* “배후”는 없는 것 같다. “배우”들은 좀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람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그런 용기도 받아주고 들어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고개를 많이 끄덕였는데, 그러고 보면 저도 보수인가 봅니다^^;;